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산타크루즈 해전 (문단 편집) == 배경 == 일본군의 [[야마모토 이소로쿠]] 제독은 '''"[[미드웨이 해전|저번엔 실패했지만]] 이번에야말로 미군 항모부대를 박살낸다!!'''"라는 생각으로 미드웨이 해전에서 손실된 1 항공전대의 항공기 탑승원들을 채워넣은 [[항공모함]] [[쇼카쿠]], [[즈이카쿠]], [[준요]], [[즈이호]] 네 척과 전함 두 척을 투입해 미군 항모부대와의 전투를 준비한다. [[윌리엄 홀시]] 제독도 이를 알고 [[엔터프라이즈(항공모함)|엔터프라이즈]]가 소속된 16기동부대와 [[호넷]]이 소속된 17기동부대를 내보내 이들에게 맞설 준비를 한다. 미드웨이 해전 이후 과달카날이 전략적 요충지임을 파악한 두 국가는 이 섬의 확보에 집중했다. 당시 과달카날에 상륙한 일본은 서둘러 항공기지 건설에 박차를 가했지만 도중 미국의 공격으로 해당 비행장이 피탈되었으며 미국은 이 비행장을 헨더슨 비행장으로 명명한다. 헨더슨 비행장은 양국 모두에게 중요한 위치였다. 일본이 이곳을 차지할 경우 미 항공세력 및 수송을 차단하여 호주를 고립시킬 수 있었으며, 반대로 미국이 차지할 경우 헨더슨 비행장에서 이륙한 항공세력과 호주에서 이륙한 항공세력을 동원하여 일본의 항공기지세력을 견제 및 차단하는 것이 가능해진다. 따라서 미국은 또 한 차례의 함대항공전인 [[동부 솔로몬 해전]]을 치러가며 헨더슨 비행장을 방어했으나 당시 과달카날 해역의 상황은 복잡하게 흘러갔다. 주간에는 제공권을 확보한 미국이 우세를 점하였고 야간에는 수상세력을 이용한 일본이 주도권을 잡은 것이다. 미드웨이 해전의 참패를 설욕하려던 일본은 다시 한번 미 항모기동부대를 끌어내 격파할 의도로 헨더슨 비행장 공략을 준비했다. 1942년 10월 하순, 당시 일본 해군의 최정예 파일럿을 선발하여 배치한 정규항모인 [[쇼카쿠급|쇼카쿠와 즈이카쿠]], 경항모 [[즈이호]], 개조항모 [[준요]]와 [[히요]]가 과달카날 해역으로 출정한다. 쇼카쿠와 즈이카쿠, 즈이호가 나구모 주이치 제독이 이끄는 공격부대(제3함대) 본대를 구성했고, 제2항공전대의 준요와 히요는 곤도 노부타케 제독 휘하의 전진부대(제2함대)와 동행하여 항공엄호를 제공했다. 전함 두 척을 중심으로 한 전진부대의 임무는 헨더슨 비행장 포격을 통한 과달카날의 일본 육군 3차 공세 지원이었으나, 아베 히로아키 제독의 공격부대 전위함대와 함께 본대 전방으로 100km 이상 돌출되어 미군의 공습을 흡수하고 여차하면 미 기동부대에 대수상 교전을 시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. 그러나 10월 22일 히요가 기관 문제로 회항하면서 일본 함대의 전력은 약간 감소한 상태였다. 일본의 움직임을 눈치챈 미국도 TF16의 [[요크타운급|엔터프라이즈]]와 TF17의 [[요크타운급|호넷]]을 합류시켜 61기동부대를 형성, 이들을 요격하도록 하면서 산타크루즈 해전의 막이 올랐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